별 일 없이 등장한 장기하와 얼굴들 1집 - 별 일 없이 산다 뮤직머신

'장기하와 얼굴들'을 처음 본 것은 2008년 GMF 공연이었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음악은 그다지 취향이 아닌 듯 싶어 조금 보다가 나와서 크라잉넛의 공연을 봤다. 크라잉넛의 한경록씨가 "저쪽에서 장기하 목소리 들리네요! 저기 재미없어~ 여기가 재미있어요~"라고 말해 모두의 웃음을 유발했다. 나름 메이저인 크라잉넛이 농담이라고는 하나 장기하와 얼굴들을 의식하는 발언을 해서 대체 쟤네들이 누구야? 하고 알아보게 되었다.
찾아본 결과 이건 랩인지 나레이션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매력적인 '싸구려커피'와 미미시스터즈의 기묘한 비쥬얼에 기묘한 율동이 중독성있는 '달이 차오른다, 가자' 등 흥미로운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재미있긴 하지만 내 취향의 노래는 아니었다. 그런데 묘하게 중독성있고 노래들이 맛깔스러워 자꾸 듣게 되더니 결국엔 괴상한 후렴구들을 따라하게 된 것이다. 어느새 즐겨듣는 음반 베스트가 되어버렸으니...

1만장 이상 판매된 초유의 히트싱글 '싸구려커피'. '싸구려 커피', '느리게 걷자', '정말 없었는지' 3개의 트랙으로 구성되었다.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기묘한 율동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는 들어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아무것도 없잖어'도 들어있지 않다.
그리고 2009년 2월 27일. 드디어 정규음반 1집 '별 일 없이 산다'가 발매되었다. 그동안의 잘 알려진 곡과 신곡을 포함 총 13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화려한 음반이다. 당연히 나는 별 일 없이 '샀다'!
인덱스는 '나와', '아무것도 없잖어', '오늘도 무사히', '정말 없었는지',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 '말하러 가는 길', '나를 받아주오', '그 남자 왜', '멱살 한번 잡히십시다', '싸구려커피', '달이 차오른다, 가자', '느리게 걷자', '별 일 없이 산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촌스러운 폰트! 그야말로 장기하와 얼굴들 답다고나 할까.
펼치면 이렇게 되어있다. 오오, 메이저 음반 답다. 디자인은 촌스러운데 묘하게 그럴 듯 해 보인다.
부클릿은 패키지의 이 부분에 이렇게 들어있다.
부클릿에는 이런 식으로 가사가 적혀 있다. 다 같이 가사집을 보며 따라부르자!

1번 트랙 '나와'는 즐거운 분위기로 쿵짝거리며 따라 부를 수 있는 곡. 랄랄랄라~하는 코러스처럼 즐겁다.

2번 트랙 '아무것도 없잖어'는 음반 발매 전부터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곡이다. 곡 자체가 가사처럼 느릿느릿 황소가 걷는 듯한 느낌인데다가 가사 중에 아무것도 없잖'어!'라고 '어'의 라임이 들어감과 동시에 '어어어어어어~'하는 식으로 코러스가 들어가는 부분이 황소의 울음소리처럼 소리를 내는 것이 재밌어서 너무 좋다. 선지자의 나레이션으로 "저 쪽으로 석 달을 가라"라던지 "나를 믿으라"하는 부분도 너무 재미있다. 그런데 정규음반에 수록된 버전은 황소 울음소리 같은 코러스가 너무 작게 들려 아쉽다. 그 부분이 압권인데 말이다.

3번 트랙 '오늘도 무사히'는 다그닥 다그닥 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서부영화 풍 기타리프가 맛깔스러운 곡이다. 멜로디가 옛스러우면서도 인디스럽다고나 할까. 좋은 곡이다.

4번 트랙 '정말 없었는지'는 싱글 음반에 3번 트랙으로 있던 곡. 싱글 버전과 별 차이는 없게 들린다. 잔잔한 곡이지만 장기하 특유의 구수함이 만점이다.

5번 트랙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은 3번 트랙과 마찬가지로 멜로디가 옛스럽다. 코러스 넣는 방식도 70, 80년대 대학가요제에서 들어본 듯한 맛이 난다. 템포가 느리고 잔잔한 곡이지만 그 특유의 옛스러움이 정겹고 귀에 쫙쫙 달라붙는다.

6번 트랙 '말하러 가는 길' 역시 멜로디가 굉장히 옛스럽다. 70, 80년대의 향기가 물씬난다. "둠두둠 따라라~"하는 코러스 또한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해준다. 촌스럽지만 묘하게 정겹고 알 수 없는 향수마저 느껴지는게 참...장기하의 이런 옛스러운 감성은 충격적이다.

7번 트랙 '나를 받아주오' 역시 70, 80년대의 향기가 물씬 나는 곡이다. '내 마음은 찐득찐득찐득찐득~'하는 가사가 그야말로 찐득찐득하게 내 귀에 촥촥 감긴다. '찐득찐득...' 뿐 아니라 '설레설레...', '엉엉엉엉...' 등 반복구가 특히나 맛깔스러운 곡. '나를 받아주오' 뒤에 오는 여성 코러스도 옛스럽다. 멜로디도 창법도 코러스도 촌스럽지만 좋다. 중독성 있고 맛깔스러운 곡이다.

8번 트랙 '그 남자 왜'는 시작부터 '그 남자 왜 나에게 마음 없는 척'하는 여성 코러스의 톡톡 튀는 코러스로 시작해서 기묘한 분위기를 안겨준다. 기타 튕기는 맛도 다른 곡들과 또 다른 맛이 있다. 구수한 장기하의 보컬이 메인에 있고 그 앞뒤로 여성 코러스가 들어가는데 그게 묘하게 촌스러우면서도 재미있다.

9번 트랙 '멱살 한번 잡히십시다'는 마치 배철수와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뒷부분에 남성 코러스로 함께 중얼거린다. 몇번 중얼거린 뒤 짧은 멜로디로 구성된 후렴을 한번 한 뒤 다시 중얼거림. 멜로디가 예전에 즐겨듣던 황신혜밴드가 생각나는 곡이다. 촌스럽고 재미있는 곡이다.

10번 트랙 '싸구려커피'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너무나 유명해서 할 말이 없다. 이 곡의 매력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사대로 눅눅한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것 처럼 귀에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곡이다.

11번 트랙 '달이 차오른다, 가자' 역시 워낙 유명해서 할 말이 없을 정도. 시작부분의 반주와 박수소리는 녹음한 것을 멀리서 튼 것 처럼 작게 들리고 보컬만 메인으로 들린다. 그러다 '워어어어어어'하는 후렴부분부터 갑자기 커지는 방식. 맛깔스러운 곡이다.

12번 트랙 '느리게 걷자'는 싱글음반 2번 트랙으로 있던 곡. 초반은 반주없이 아카펠라처럼 시작한다. 이후에도 연주는 최소한으로 곁들이는 방식. 걷자 걷자 걷자...중독성 있는 곡이다.

13번 트랙 '별 일 없이 산다'는 앨범 제목과 같은 제목의 곡. 보컬에서 배철수 느낌이 나게 부른다. 1979년 대학가요제, 배철수가 몸담던 활주로의 '탈춤'이 떠오른다. 아아, 맛깔스럽다. 최고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는 곡들이 전부 개성적이다. 보컬방식도 연주방식도 곡마다 다르다. 하지만 그렇게 각기 다른 곡들의 공통점이 있으니 '구수하다', '맛깔스럽다', '촌스럽지만 좋다'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장기하는 1982년생이다. 아직 27살 밖에 안 된 젊은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1970, 80년대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의 창법과 멜로디나 코러스, 연주, 곡을 구성하는 방식 전체가 마치 1970, 80년대 대학가요제 때로 되돌아 간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해준다.

촌스럽지만 멜로디가 강하고, 구수하면서도 개성만점인 가수가 많았던 1970, 80년대. 배철수의 화신인 것 같은 그의 구수함, 그리고 그런 특징이 요즘의 젊은이들한테도 먹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DC나 웃대에서 '달이 차오른다, 가자'의 기묘한 안무를 화제삼아 유행처럼 번지긴 했지만 그것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기의 시발점이었을 뿐이다. 미미시스터즈의 덕을 본 강렬한 안무 외에도 맛깔스러운 그의 노래들은 사람들을 중독시키기엔 충분했다.

어느날 혜성처럼 나타나서 인터넷을 떠들썩 하게 하고, 인디씬을 비롯하여 현재 최고의 인기 아이돌 그룹에도 견줄만하게 음반이 화제가 된다던지 하는 것, 그리고 그의 음악 스타일이 결코 대중과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닌, 요즘에는 좀처럼 쓰지 않는 개성으로 똘똘 뭉친 스타일이라는 점이 마치 왕년의 '서태지와 아이들'을 떠오르게 한다. '인디계의 서태지'라는 별명이 생긴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리라. 그러고보니 3월 14일에 서태지 세컨드 싱글 음반 발매 기념 공연이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열린다 하는데 거기에 장기하와 얼굴들이 게스트로 출연한다고 한다. 이러다가 서태지가 주관하는 락 페스티발인 ETPFEST에 참가할 지도 모르겠다.

별 일 없이 등장하여 별 일 없이 히트하고 순풍을 탄 돛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장기하와 얼굴들. 1970~80년대에 이미 사멸된 음악 스타일을 2008년부터 다시 부활시킨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장기하와 얼굴들 외에 이런식의 노래로 히트하는 그룹이 아직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이들의 히트는 분명 한국 음악 역사에 한 획이 되리라 믿는다. 비슷비슷한 스타일의 랩댄스와 소울/발라드만 범람하는 한국가요계에 장기하와 얼굴들 같은 그룹이 더더욱 늘어나면 좋겠다. 이상태로 계속 승승장구하여 2집도 내고 3집도 내고 발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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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wanybak 2009/03/11 23:58 #

    드럼으로 치고있는 "눈뜨고코베인"도 좋고
    같은 붕가붕가레코드의 "치즈스테레오"도 너무 좋아요..
  • 플로렌스 2009/03/12 08:05 #

    그쪽 동네에 푹 빠지셨군요. (^.^);
  • 알트아이젠 2009/03/12 08:43 #

    학기초 결산(교재값)이 끝나면 바로 구입할 생각인데, 휴교문제때문에 자꾸 지체되어 발을 동동 구르네요. 그런데 '달이차오른다, 가자'가 없다는건 조금 충격입니다.;;
  • 플로렌스 2009/03/12 08:57 #

    싱글음반엔 없지만 정규음반엔 11번 트랙으로 들어있습니다. (^.^)
  • sinyoung 2009/03/12 09:34 #

    저도 요새 완전 열심히 듣고 있어요 ㅋㅋ '별일 없이 산다'는 최고의 이별 후 복수곡인듯!!
  • 플로렌스 2009/03/12 11:32 #

    가사도 꽤나 흥미진진해서 좋지요. (^.^);
  • 은현 2009/03/12 10:01 #

    아 어서 질러야 하는데 말이죠 -ㅅ-;;
  • 플로렌스 2009/03/12 11:33 #

    빨리 지르세요. 망설임은 후회의 시작입니다. (^.^)
  • 혜진 2009/03/12 13:46 #

    왠지 붕가붕가 레코드는, 타이포가 맘에 들어요(응?)
  • 플로렌스 2009/03/12 14:27 #

    각 타이틀마다 폰트도 다 다르고,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그게 나름 디자인 컨셉에 어울린다 생각합니다.
  • 썰린옹 2009/03/12 14:00 #

    복고풍의 디자인이 참 마음에 드네요.
    정작 노래는 하나도 들은게 없지만 체크리스트에 넣어야할듯.
  • 플로렌스 2009/03/12 14:28 #

    노래도 복고풍. 70, 80년대 대학가요제에서 종종 보던 포크락 같아요.
  • msg78 2009/03/12 15:33 #

    주변에서 하도 장기하 장기하 하길래 누군가 했더니 달이차오른다 부르던 그분이었던거군요!!;;;
  • 플로렌스 2009/03/12 15:55 #

    '달이 차오른다, 가자'의 그분이지요.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 --G-- 2009/03/12 19:57 #

    리뷰 잘 읽었습니다. 처음 들었을땐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중독성이 최고예요. 저 음반은. 저도 모르게 하루종일 '별일없이 산다'를 부르고 있습니다.
  • 플로렌스 2009/03/12 21:15 #

    분명 음반에 마약이라도 탄 듯 싶습니다. 이 중독성이란...!
  • 박고자 2009/03/18 15:13 #

    안녕하세요^0^
    날짜 좀 된 포스트에 뒷북 댓글이지만 그래도 남겨봅니다ㅎㅎ; 서태지 콘서트에 장기하와 얼굴들이 게스트로 나온 건 15일이었어요(네 제가 갔던 그 공연...) 14일은 요조였던 걸로 기억한다능

    장기하가 산울림을 그렇게 존경한다고 들었어요... 그의 그 7, 80년대 감성은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는 산울림도 좋고 장기하도 좋아요!!!>.<
  • 플로렌스 2009/03/18 15:45 #

    서태지 콘서트의 장기하. 대체 어떤 아양을 떨어서 서태지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재밌었을 것 같습니다. (^.^)
  • eviltwin 2009/04/06 15:39 #

    본인은 정작... 자취한번 안해봤다는것도 참. 아이러니
  • 플로렌스 2009/04/06 17:31 #

    대학 동기의 자취방에는 자주 놀러갔을테니 간접체험은 했겠지요.
    음악하는 친구들의 자취방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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