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웰스의 '타임머신'에서 비롯됐다 -[시간의 지도(the Map of Time)] 읽거나죽거나

시간의 지도 (the Map of Time)
(펠릭스 J. 팔마 저/변선희 역 | 살림출판사 | 원서 : El Mapa del Tiempo)

19세기 영국,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소설.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시간여행이라는 소재와 함께 메타픽션의 구조, 각기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3가지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라는 설명 때문이었다.

메타픽션은 픽션과 리얼리티 사이에서 의문을 드러내며 작품이 스스로 가공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현실과 소설이 하나로 연결되고 작가의 세계관을 통해 현실을 소설로 구성할 때 쓰인다고 한다. 과연 이 작품에서 허구와 현실이 어떻게 무너질 것인가.

작가는 마치 독자들의 눈앞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책을 전개시킨다. 배경과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행동, 사건 등을 관찰만할 뿐 아니라, 과거나 숨겨진 이야기 등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다. 이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나중에 다시 나올거라는 언급을 하기도 하고, 스쳐지나가는 사람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하고 다시는 나오지 않을테니 여기서 설명을 끝낸다고 한다던지, 뭔가 중요한 장면에서 능청스럽게 다른쪽으로 화제를 전환시킨다던지. 하나의 이야기꾼으로서 책에 존재한다.

19세기, 그러니까 1800년대 후반의 영국. 전기는 발명됐지만 아직 등불을 주로 쓰고 있고 증기기관차가 있지만 사람들의 주 교통수단은 아직 마차를 이용하는 시절. 휴지라는 것으로 뒤를 닦기 시작하고 약제사인 J.S.펨버턴 박사는 코카의 잎과 콜라 열매, 카페인으로 신개념의 강장제 '코카콜라'를 개발한다.

1888년 8월 31일.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에 위치한 화이트채플 가에서 한 매춘부가 조각난 시체로 발견된다. 시체는 심하게 훼손됐고 장기까지 적출되어있었다. 이후 11월 9일까지 2개월간 5명 이상의 매춘부들이 엽기적인 시체로 발견되었다. 역사에 이름이 남은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의 사건이다.

아서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의 모험(1892)'과 '셜록 홈즈의 회상록(1894)'를 발표했고,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놀라움의 연속이던 시절. 공상과학소설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1895년,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명 비평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는 '타임머신'이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타임머신, 시간여행자(타임트래블러), 시간여행 등의 단어와 개념의 탄생이다. H.G.웰스는 오늘날 '과학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사람으로 '타임머신' 이후에도 '투명인간(1897)', '우주전쟁(1898)' 등 이후 수백년 동안 수차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 명작 소설들을 탄생시킨다. 1897년에 브램 스토커는 '드라큘라'란 작품을 발표하여 '드라큘라'라는 단어와 그 괴물에 대한 개념을 탄생시켰다. 드라큘라의 숙적인 헬싱교수 역시 이 작품의 인물이다.

지금 나열한 이야기들은 전부 실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소설속에서 살짝 살이 붙어서 다시 한번 설명되어진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사람들과 사건은 직/간접적으로 이 '시간의 지도'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핵심이 된다.


책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아래 내용을 보기 전에 책을 꼭 먼저 읽어보기를 바란다.


첫번째 이야기는 '잭 더 리퍼' 사건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시간여행]의 이야기이다, 마리 켈리란 이름의 매춘부와 사랑에 빠진 부잣집 청년 앤드류. 불행하게도 그 매춘부는 잭 더 리퍼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마리 켈리는 실존인물로, 그밖에 잭 더 리퍼에게 살해당하는 매춘부들의 이름 또한 전부 실제 기록에 남아있는 실존 인물들이다. 사랑하던 여인이 더이상 인간의 형체가 아닌 끔찍한 고깃덩어리로 변한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한 앤드류는 큰 충격과 실의에 빠져 그녀가 죽은 곳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 사촌인 찰스가 등장하여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를 바꿔 그녀를 살리자고 제안한다. 2000년대로 여행할 수 있는 게이트를 발견하여 그것을 관광코스로 만든 길리엄 머레이. 실제로 타임머신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타임머신]의 작가 H.G.웰스. 그들을 찾아가 과거를 바꾸려고 하는 앤드류의 이야기.


두번째 이야기는 현재(19세기)의 귀족 여성 클레어와 미래(2000년)의 남성 섀클리턴이 [시간여행]을 통해 만나게 된 뒤 벌어지는 사랑이야기. 위에 등장한 머레이 여행사를 통해 2000년대로 [시간여행]을 한 클레어는 놀라운 것을 보고 만다. 2000년에 로봇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들을 섬멸하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조직을 구성하여 로봇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들의 대장 섀클리턴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머레이 여행사가 준비한 미래여행의 스토리는 영화 '터미네이터'와 비슷하다. 터미네이터는 2029년이었던 반면, 이 이야기의 미래는 2000년이라는 점, 로봇과 미래 배경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허술하다는 점만 다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2000년의 묘사가 엉터리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시간 게이트에 대한 묘사 또한 말도 안된다. 아마존 오지에서 특정 원주민들이 소환하는 마법으로 열리는 게이트를 상자에 담아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작가가 일부러 배경이 되는 19세기 사람들의 관점에서, 당시의 좀 허무맹랑한 공상과학소설 흉내를 내려고 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이 책이 2008년에 발간된(국내에선 2012년에 발간) 책이라는 점을 보면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시간여행]은 당연히 사기꾼의 공작이다. 문제는 클레어와 섀클리턴이 사랑을 이어나가는 과정이다.

클레어는 사기꾼이 만들어낸 미래 인류 대장의 모습에 반해버리고, 미래 인류 대장 새클리턴 역의 톰은 자신에 대한 그런 여자의 열정에 욕정을 느껴버린다. 실은 빈민에 불과한 톰은 그녀의 마음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일생 최고의 잠자리를 가지려고 한다. 결국 목적달성에 성공하지만 [시간여행]에 대한 거짓말이 일을 크게 만들어 결국 첫번째 이야기에서도 해결사로 등장한 H.G.웰스를 찾아가게 된다.


세번째 이야기는 위의 이야기들에서 조연으로 등장한 가렛 형사와 클레어의 친구 루시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H.G.웰스. '타임머신'의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투명인간'의 첫 도입부를 쓰고 있는 도중의 이야기이다. 이전 이야기에서 계속 등장한 길리엄 머레이의 도움 요청에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한 웰스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는다. [시간여행]으로 미래에서 19세기로 온 사람의 등장. 그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간의 지도]를 보여준다. 평행우주의 개념과 시간여행에 따라 똑같은데 미묘하게 달라지는 세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은 'SF소설'이라고 들었는데 정작 책을 읽어보니 초중반은 'SF'를 소재로 한 리얼리티 소설에 근접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기본으로 살이 붙어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시간여행]이 나오기는 하지만 진짜 시간여행이라기보단 진짜 같은 가짜인 것이 그 정체. 마치 영화 '일루셔니스트'에서 나오는 '진짜 마술'의 이야기와 같은 개념이다. 은근히 추리물스러운 구석도 있어서 어느것이 진짜인가, 왜 그것이 그렇게 되었나 하는 의문점들을 남기기도 하고, 그것들이 다른 이야기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정체가 밝혀진다던지 한다. 이런 구성 진짜 좋아하는데 딱 기대한만큼의 즐거움을 줬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 '타임머신'이란 소설을 만든 H.G.웰스를 중심으로 [시간여행]에 관한 지극히 있음직한 소설이었다. 문제는 세번째 이야기. 여기에서 갑자기 반전이 일어난다. 여태까지 있던 모든 사건들이 [시간여행]으로 인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왜 그 때 그런 일이 있었는지, 왜 거기서 누가 그랬는지가 짜맞춰지며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재탄생하게 된다.


상황을 짐작하면 시대의 배경은 1896년의 런던. 매력적인 시간대와 매력적인 장소에서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매력적인 이야기가 가득한 소설. 어디서부터가 '진짜'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짜'인가. 이야기 속에서도 그것을 끊임없이 다루며 소설 자체도 마찬가지로 독자를 홀린다.

어렸을 때부터 H.G.웰스의 공상과학소설들을 좋아했는데, 19세기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소설. 그것도 메타픽션에 다중 구성이란 점 때문에 확 끌려 보게 되었다. 그런데 설마 H.G.웰스 자체가 이야기들의 핵심이 될 줄은!

게다가 이야기 속에서수많은 시간여행에 얽힌 이야기들의 시발점은 결국 그가 탄생시킨 [타임머신]이란 소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책 [시간의 지도] 또한 그가 탄생시킨 소설 [타임머신]을 기반으로 이어져 내려온 [시간여행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재밌는 것은 [타임머신]의 주인공은 결국 작가인 웰스 자신이었는데 이 [시간의 지도]에서 3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각 이야기에서 핵심이 되는 인물 역시 웰스란 점.

어째 취향일 것 같았는데 제대로 취향 직격!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몰라도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왜냐하면 소설 속에서 그것들을 자세히 알려주니까) 실화와 픽션이 뒤섞인 리얼 SF소설이다.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



덧글

  • 충격 2012/02/24 02:30 #

    저도 취향일 것 같네요.
    읽게 될지 모르니 내용 부분은 안 보고 내렸습니다만

    예전에 '미래의 추적자' (TIME AFTER TIME, 1979) 라고
    H.G.웰스가 자기가 개발한 타임머신 타고 도망간 잭 더 리퍼 잡으러 다니는 영화가 있었죠.
    동시기이다 보니 은근히 자주 엮이는 듯...
    어쩌면 저자가 이 영화를 보고 구상을 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겠다 싶고요. :)

    (이 영화는 국내에 DVD 정발도 되어 있습니다.
    품절 상태인 게 문제이긴 한데...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찾아보셔도 좋을 듯)
  • 플로렌스 2012/02/24 09:39 #

    앗! 그거 봤던 것 같기도...머릿속에선 1960년에 나온 타임머신 영화와 마구 뒤섞여버린 듯 싶습니다만; 안그래도 시간의 지도 읽은 뒤 갑자기 옛날에 재밌게 봤던 저시기의 소설 원작 영화들이 보고 싶어지더군요. 특히 어렸을 때 TV나 비디오로 봤던 것들.
  • 2012/02/24 06:4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플로렌스 2012/02/24 09:39 #

    시간여행과 메타픽션, 다중구조는 정말 매력적이지요.
  • FlakGear 2012/02/24 14:53 #

    뭔가 복잡하지만 매력적일 것도 한데...
  • 플로렌스 2012/02/24 15:32 #

    실제로 읽어보면 단순해요. 3부에서 평행우주 나올 때 조금 복잡해지지...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Twitter

위드블로그 베스트 리뷰어

2011 이글루스 TOP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