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지력 20년, 되돌아보는 1992년 뮤직머신

요즘 서태지 20주년이라고 한창 난리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이 나온지 20주년이다. 1992년 3월 23일이 정식으로 1집이 발매된 날이고, '서태지'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뮤지션으로서 활동한 것은 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 2월에 발매된 시나위 4집에도 베이시스트 '서태지'로 되어있었다. 나는 서태지 20주년이라고 말하지 않고 서태지와 아이들 20주년이라고 말하겠다. 나에게 있어 '서태지와 아이들'은 무엇보다도 특별한 추억이다. 내 청소년기를 상징하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1991년, 어느날 동생과 함께 아빠 차를 타고 가는 도중 갑자기 아빠가 말했다.

"너희들, 서태지와 아이들이라고 알아?"

우리 둘은 모른다고 말했다. "요즘 라디오에서 종종 나오는데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부르거든? 굉장히 독특한 음악을 하더라. 꽤 괜찮은 것 같던데..."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직 유명해지기 이전이었다. 음반은 발매되었지만 방송에 나오기 이전인지, '특종TV연예'를 통해 첫 데뷔무대(1992.4.11)를 가졌지만 안좋은 평을 듣고아직 방송에 활발히 나오지 않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적어도 그 시기에 우리반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아는 애들은 없었고, 길거리에서도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는 없었다. 아마 1991년 3~4월 경임은 분명하다.

며칠 뒤, 아빠는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사오셨다. 우리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나보다. CD가 대중화되기 이전이니 당연히 카세트테입이었다. 요즘 mp3 다운로드 때문에 사람들이 음반을 잘 안산다고 말하지만 1980년대부터 90년대 역시 사람들은 음반을 잘 안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반은 일정 수준 이상의 재력을 갖춘 사람들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 구입하는 사치품 같은 것이었고(대체로 레코드판으로 수집. 그나마 백판이라고 해서 불법복제 레코드판의 천국이었다.), 일반 서민들은 길거리에서 파는 당시 유행하는 곡들이 가득 담긴 카세트 테입을 구입하거나, 음반점에서 요즘 유행하는 노래들을 원하는대로 녹음해주는 카세트 테입을 구입했다. 요즘으로 치면 멜론차트10 뭐 이런 것을 카세트 테입으로 길거리와 음반점에서 구입하는 것이랄까. 물론 훨씬 싼 가격에 정규음반을 불법복제한 음반들이 판을 쳤고 일반 서민들 대부분은 그런 불법복제품으로 음악생활을 영유했다. 우리집은 당시 잘사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음반점에서 녹음해주는 유행가 모음집을 구입하기만 했지 정식으로 음반을 구입한 적은 거의 없었다. (크리스마스 때 영구 캐롤과 쓰리랑부부 캐롤을 선물로 받은 기억은 난다) 그러니까 서태지와 아이들 1집 구입은 우리집 최초의 정규 음반 구입이었던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1992.3.23),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 음반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구입해서는 아빠가 말한 '난 알아요'만 줄창 들었다. 왜냐하면 다음 트랙인 '환상속의 그대'가 영 귀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엔 '랩'이란 것이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고(정확히는 가요계에서 랩을 내세운 뮤지션은 존재하지 않았고) 멜로디 없이 랩과 샘플링, 비트만 있는 그런 곡은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수록된 곡들도 주옥같은 곡들 뿐이었는데 말이다.

며칠 뒤, 한국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으로 가득차버리게 되었다. 길거리 어디를 가도 '난 알아요'가 흘러나왔다. 모든 종류의 가게에서 '난 알아요'를 틀어놨다. TV, 라디오에서도 서태지와 아이들만 끝도 없이 나왔다. 애들은 노트에 '난 알아요'의 가사를 적고 랩을 따라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곧 모든 애들은 '난 알아요'의 가사를 암기하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장기자랑만 했다하면 너도나도 '난 알아요'만 불렀다. 


한국 최초의 '랩댄스'. 이것은 혁명이었다. 한국 가요계의 판도를 180도 바꿔버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한국에 '랩'을 하며 춤을 추는 가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아이돌 그룹 비슷한 댄스그룹 '소방차'와 댄스 필이 충만한 '김완선'이 존재하긴 했지만 '랩댄스'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고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브레이킹' 중심의 댄스를 하는 그룹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난 알아요'를 부를 때 음악만 나오는 부분에서 양현석은 웨이브를 선보였고 이주노는 헤드스핀이나 윈드밀 등 고난이도의 브레이킹을 선보였다. 한국에 그런 고난이도의 댄스 테크닉을 선보인 그룹은 그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엔 '비보이'라고 해서 그런 브레이킹 전문팀들도 많아졌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엔 전문적인 팀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에는 모든 음반사들이 랩댄스 그룹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없어도 만들어냈다. 

1991년 이전 한국 가요계는 트로트와 발라드, 적당히 율동만 하는 가벼운 댄스곡만 존재했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 '랩댄스' 그룹으로 가득차버리게 되었다. 솔로 가수보다는 그룹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연령대도 굉장히 낮아졌다. 모조리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랩댄스 그룹이었다. 모든 그룹은 춤을 추며 노래를 했고, 노래에는 반드시 랩을 넣었다. 어울리지 않아도 어떻게든 랩을 쑤셔넣었다. 한마디로 한국 가요계는 랩댄스 그룹으로 가득차버렸고 이 바뀌어버린 판도는 20년간 지속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춤 안추고 랩 안하는 그룹 거의 없고, 어린애들로 구성되지 않은 그룹 거의 없고, 그런 그룹이 대세이며 '한류'라고까지 칭송받는 시대. 결국 서태지와 아이들로 인해 그 흐름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바꾼 것은 한국의 가요계와 일반 대중의 귀와 취향 뿐만은 아니었다. 좀 얌전하게 입고 나오던 기존 가수들과는 달리 서태지와 아이들은 기묘한 차림을 하고 나왔다. 형광색으로 가득한 형형색색의 화려한 옷에 모자, 그것또 거꾸로 쓴다던지, 텍을 떼지 않는다던지, 상의를 바지 밖으로 꺼내 입는다던지 당시 방송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파격적인 패션을 하고 나왔던 것이다. 소위 말하는 양아치 패션. 지금보면 촌스럽고 웃기지만 당시 옷가게들은 너도 나도 그 촌스럽고 화려한 옷을 없어서 못팔 정도였다. 이대 옷가게 거리가 전부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스타일의 옷만 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한국 패션의 변화도 가져왔던 것이다.


1992년, 아이들의 최고 화제는 언제나 '서태지와 아이들'과 '스트리트 파이터 2'였다. '스트리트 파이터 2' 역시 기존에 없던 신장르로 게임계의 역사를 180도 뒤바꿔버렸고 이후 모든 게임사들이 너도나도 대전격투게임만 만들어댔으니 '서태지와 아이들'은 '스트리트 파이터 2'와 닮은 점이 있다. 너무나 신선하고 놀라웠으며 인기가 지나칠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업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버렸고, 이후 여기저기서 줄창 비슷한 것들만 나오며 장르의 다양화가 사그러드는 부정적인 영향도 끼쳐버린 것까지 말이다. '스트리트 파이터'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만큼 말할 거리가 많은 소재이므로 여기선 일단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해서만 말한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당시 최고의 대세였던 '스트리트 파이터 2'.
한개 오락실의 오락기들이 전부 스파2였고, 그런데도 동전을 쌓아두고
줄서서 한참 기다려야만 간신히 해볼 수 있는 초인기 게임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난 알아요'로 모든 가요차트 1위를 석권했고 17주 연속 1위였나 해서 대한민국 가요계 차트 역사를 다시 한번 바꿔버렸다. 당시 한개 노래로 1위를 몇번인가 하면 더이상 그 노래를 부를 수는 없었는데 이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들고 나온 노래는 '환상속의 그대'였다. 한개 음반을 낸 뒤 '타이틀곡'을 부르고 그 타이틀곡으로 일정 시간 인기를 끈 뒤 다른 트랙을 후속 타이틀곡으로 내는 것. 지금은 굉장히 흔한 개념이지만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들 타이틀곡 하나만 줄창 부르기 일쑤였고, 다음 타이틀곡은 다음 음반에 수록한다던지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타이틀곡'-'후속곡'으로 이어지는 한국 가요계의 독특한 판도를 만들어냈다. 해외의 경우에는 싱글음반을 발매하고 타이틀곡 하나와 커플링곡 하나 혹은 복수(B-Side)가 들어있는데, 다음 타이틀을 낼 때엔 또 새 싱글을 내고 이것이 누적된 뒤 정규앨범을 내는 것을 반복했다. 타이틀곡에 이어지는 한국 최초 '후속곡'의 개념.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이 만든 독특한 문화이다. (요즘에는 한국도 타이틀곡 하나에 복수의 B-Side가 수록된 미니앨범(EP)이나 싱글을 몇번 낸 뒤 정규앨범을 내는 스타일이 많아졌다.)


1992년 여름,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의 라이브 콘서트가 열렸다. 댄스그룹이지만 독특하게도 '애벌런쉬'라고 하는 헤비메틀 그룹을 세션으로 기용했으며, 댄스그룹에 어울리지 않게 노래는 물론 연주까지 라이브로 진행한 기묘한 콘서트였다. 애석하게도 난 이 공연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그해 가을에 발매된 비디오테입으로만 봤다. 이 공연에서 서태지는 1집 수록곡인 'Rock'n Roll Dance'라는 댄스곡을 원곡인 AC/DC의 'Back in Black' 스타일로 바꿔서 불렀고 이후에도 계속 원곡 스타일로 부르게 된다.


그해 가을에는 환경콘서트 '내일은 늦으리'라는 것이 열렸다. 한국 최고의 가수들이 모여 환경을 지키자는 캠페인의 콘서트였다. 공연은 물론 각 가수가 환경을 보전하자는 내용의 오리지널 노래를 작사/작곡하여 하나의 음반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이 '내일은 늦으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댄스그룹이면서 '나를 용서해주오'라는 헤비메틀 장르의 노래를 선보여 팬들은 물론 대중들을 놀라게 했었다. 통상 서태지는 '시나위'라는 유명한 헤비메틀 그룹 출신이라기보단 댄스그룹으로만 알려졌기 때문이다.

1992년 환경콘서트 앨범 '내일은 늦으리'.
서태지와 아이들, N.EX.T(신해철), 정석원(공일오비),
이승환, 푸른하늘(유영석), 윤상, 푸른하늘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참여한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11월에는 미국 LA에서 공연도 하고 오고, 1집의 라이브 앨범과 리믹스 곡을 한데 모은 'TAIJIBOYS Live & Techno Mix'라는 앨범을 발매했다. 라이브 앨범이야 다른 가수도 내는 것이었지만 리믹스 앨범을 내는 것은 한국 가요계에서는 굉장히 희귀한 일이었다. 물론 이현우가 히트곡이었던 '꿈'을 리믹스해서 그야말로 '꿈' 한곡만 각기 다른 버전으로 리믹스한 앨범을 1992년 4월에 발매했으니 서태지와 아이들이 최초는 아니긴 하다만. 한국에서 '테크노'라는 단어 자체가 익숙하지 않던 시절, 일찍부터 테크노풍의 음악을 만든 것 역시 서태지였다. 신디사이저와 미디를 활용한 음악 작곡은 신해철이라던지, 윤상이라던지 당시 이미 쟁쟁한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본격적인 '테크노'의 도입은 역시 서태지가 시대를 앞서갔다. (신해철이 당시 결성한 그룹 'N.ex.T'의 1집은 테크노밴드를 지향했지만 실제 음악은 테크노라기보단 신디사이저를 활용한 락음악 같은 분위기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라이브&테크노 앨범의 놀라운 점은 역시 '환상속의 그대'였다. 1집에 수록된 '환상속의 그대'는 솔직히 말해 지루하다. 같은 스타일이 반복되고 랩의 가사만 달라질 뿐이었으니까. 근데 이 테크노 앨범에 수록된 버전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 리믹스도 잘 하면 이렇게까지 화려하고 멋지게 어레인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20년전 서태지가 만든 테크노 음악은 지금 들어도 그렇게 촌스럽지는 않다.

서태지와 아이들 'Live&Techno Mix'(1992.11.20)
댄스그룹인데 헤비매틀그룹 세션의 라이브라던지,
지금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테크노 음악이라던지. 기묘한 앨범.


그런데 1992년, 돌연 서태지와 아이들이 잠적한다. 방송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언론과 방송에선 난리가 났다. 당시에 가수가 활동을 중단하거나 그러는 일은 심각한 사고가 발생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중단의 이유는 간단했다. 다음 앨범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서태지는 모든 곡의 작사작곡을 담당했고, 1년 단위로 새 앨범을 내야 계약 때문에 항상 새 앨범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렸다.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는 도저히 신곡들을 만들어서 새 앨범을 만들 여력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은퇴선언 당시 서태지는 이를 '창작의 고통'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들이 다음 앨범 준비를 위해 잠적했을 때 언론은 연신 각종 루머를 만들어서 보도했다. 서태지가 죽었다느니 사고가 났다느니 누구랑 열애중이라느니...활동을 안하는 동안에도 언론들은 계속하여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도하기에 급급했다. 사실이건 거짓말이건 상관없이 '서태지'의 이름만 들어가면 대중들은 관심을 가지고 쳐다봤으니까. 요즘에 가수나 그룹이 방송활동을 하다가 다음 앨범 작업 준비를 위해 잠적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다음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선택이다. 잠적기간동안 곡과 안무 등의 퀄리티를 높이면 다음 앨범에서 다른 가수들에 비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새 앨범 발표-타이틀 곡 발표-후속곡 발표-활동 중단 후 다음 앨범 준비'의 시스템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구축했으며 이후의 모든 가수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전략이 된다. 방송활동 중단 후 새 앨범 준비. 이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에서 최초로 구축한 시스템이다. 작곡가였던 서태지가 엄청난 스케줄 속에서 도저히 계약대로 새 앨범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부득이한 선택이 한국 가요계의 대표적인 시스템이 될 줄이야....


1993년 6월에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이 나오기 전까지 거의 반년간 '서태지와 아이들'의 모습을 어떤 방송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최신 모습 또한 볼 수 없었으니 과연 잠적의 달인 서태지. 죽거나 사고를 당했다는 소문이 퍼질만도 했다. 그 반년간 셀 수 없이 많은 랩댄스 그룹이 등장했고, 너도나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뒤를 잇기 위해 경쟁했었다. 그중에는 꽤 괜찮은 그룹도 많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이 나오더래도 예전만한 인기를 못얻을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했다. 보이지 않으면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1993년 중순,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이 나오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언제나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덧글

  • 2012/03/25 23:2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플로렌스 2012/03/26 10:42 #

    소녀시대 9명이 누군지도 다 알아요! 저는 누가누군지 모르겠더만;;
  • 2012/03/26 01:0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플로렌스 2012/03/26 10:42 #

    그러고보니 당시엔 뮤직비디오란 개념도 없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작했군요.
  • 오즈 2012/04/01 22:32 #

    방대한 정보에 감탄하고 갑니다. 기억력이대단하시네요.
  • 플로렌스 2012/04/02 00:40 #

    정확한 날짜까지는 기억이라기보단 서태지 아카이브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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