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안 (2012.10.11)
박루슬란 감독, 스타니슬라브 티안 주연, 김꽃비 조연
박루슬란 감독, 스타니슬라브 티안 주연, 김꽃비 조연
중앙아시아 중부의 우즈베키스탄. 이곳에는 '고려인'이라 불리는 인종이 살고 있다. 조선시대에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을 구소련이 당시 자신의 영토였던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고, 그 결과 한국인의 혈통이지만 한국말은 전혀 못하며 러시아어나 우즈베키스탄어를 사용하는 '고려인'이 그 나라 인종의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그런 고려인이 주인공인 영화이다. 감독인 박루슬란이 바로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 4세. 자신과 자기 친구들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고려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는 극히 희귀하긴 하다. 영화의 시작은 딸에게 들려주는 동화를 통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고려인'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고려인'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감독 말에 따르면 '좌절하지 않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사람마다 품고 있는 '하나안(약속의 땅)'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타쓰'라는 고려인 4세의 칙칙한 인생 방황기이다. 부모님도 없고, 주차장 관리일을 하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생활.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던 마약단속 형사가 되었지만 부정부패로 얼룩진 경찰서에 질려서 관둬버리고, 결국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다. 간신히 마약에서 벗어나서 친구를 따라 '약속의 땅, 하나안'이라 할 수 있는 한국으로 가지만 그곳에서 다시 마약과 얽히게 되니 그야말로 좌절의 연속이다.
영화는 음울하기 짝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칙칙하다. 불량한 친구들은 하나씩 죽어나가는데다가 경찰서의 부정부패와 마약에 관한 이야기이니 결코 밝을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인데 야한 장면이나 잔인한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성인등급인 이유는 영화의 소재가 '마약'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헤로인을 복용하는 방법을 상당히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가루로 되어있는 헤로인을 카드로 잘게 만든 뒤 종이를 말아 코로 흡입하거나, 물과 섞어 주사로 투여하는 방법 등이 나온다. 특히 주사로 투여하는 방법은 단순히 물과 섞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복잡한데 그 과정을 하나하나 자세히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음울함에 한몫 하는 것은 역시 음악. 나른한 일렉기타 사운드와 음울한 멜로디가 영화의 분위기를 더더욱 가라앉혀준다. 음악은 인디뮤지션 '전자양'이 담당했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친구 중, 한국으로 유학간 친구는 이 영화의 감독인 박루슬란 본인이 직접 연기를 했다. 그리고 그의 부인으로는 독립영화계의 히로인이라는 김꽃비가 출연한다. 영화는 수시로 핸드헬드로 촬영되어 움직일 때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린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스타쓰는 연기경험이 전혀 없는 배우이며, 영화속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던 고려인 4세이고, 주차장 관리직을 하다가 경찰이 되기도 했다가, 한국으로 들어와 강원도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가 계속되었다면 결국 한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스타쓰의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르겠다. 쳐진 눈썹이 불쌍하면서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묘한 매력이 있는 배우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이 주인공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독특한 작품이긴 했지만 내용 자체는 마약에 얽힌 음울한 이야기. 결코 남에게 쉽게 추천할 수 없다. 이 영화가 고려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약에 얽힌 한 남자의 칙칙한 인생 방황기라는 점을 감안하고도 흥미가 간다면 한번쯤 봐볼만 할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캐나다 토론토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고, 하와이영화제 넷팩상(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과 대만의 타이페이영화제 최우수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니 말이다.
(2012.10.8 20:00 서울아트시네마 관람)
덧글
잘 몰랐어요. 그런것을 알려주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지 싶네요.
좋은 글 잘 보고 가요~
한국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대입시키니 어째서인지 참 기분이 묘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