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괴수와 수퍼로봇, 퍼시픽 림 (Pacific Rim, 2013) 영화감상

퍼시픽 림 (Pacific Rim, 2013)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거대 로봇과 거대 괴수가 싸우는 영화라길래 어렸을 때부터 재미있게 봤던 일본 특촬 영화나 드라마, 로봇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동양과 서양의 감각 차이가 있다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감독이 길예르모 델 토로라는 것과 미리 공개된 화려한 영상에서 기대감은 있었지만 거대괴수 '고지라'도 '갓질러'가 되어버린 헐리우드 영화계가 아닌가. 적어도 일본 괴수물,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전형적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서양 SF물스러움 가득한 작품이 아닐까 하며 거대로봇과 괴수란 단어에 흥분과 함께 떠오르는 기대를 꾹꾹 억누르고 있었는데...보고 온 사람들의 평이 장난 아니다!?

얼핏 보이는 단어와 표현에서 내가 기대한 그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재밌게 본 고지라를 비롯한 일본 괴수영화나 후레시맨 같은 특촬 드라마, 마징가Z 같은 수퍼로봇물의 '제대로 된 영상화'. 어찌보면 트랜스포머 1탄을 보며 자동차가 진짜로 로봇으로 자연스럽게 변하는 광경에서 놀랐던 그 기분 이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한 평은 로봇은 들러리고 미군이 주역인 트랜스포머 2탄과 3탄보다는 이 퍼시픽림이 확실하게 재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본 감상은...


거대 로봇과 거대 괴수의 싸움을 그린 일본 서브컬쳐계에 대한 훌륭한 오마쥬. 이보다 더 대단할 수는 없었다.

내용은 단순명쾌. 퍼시픽림(환태평양 지역)에 나타난 포털을 통해 정체불명의 외계괴수들이 침략해오고, 인류가 그에 대항하여 거대 로봇 '예거'를 만들어 싸운다는 것. 그러나 나중에 인류는 열세에 몰리고, 주인공을 기준으로 한 소수팀이 포털 자체를 없애기 위한 최후의 작전에 돌입. 그리고 이겼다! 끝! 이런 단순명쾌한 점이 장점이자 단점인 듯 싶다. 하지만 오락영화라면 역시 이렇게 쉽게쉽게 가는 것이 최고. 그저 거대로봇과 거대괴수의 액션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으면 된다.

그냥 거대로봇과 거대괴수가 싸우는 것 뿐만이 아니라 꽤 많은 요소에서 일본 서브컬쳐스러움을 오마쥬하고 있는 것 또한 즐거운 점이다. 괴수의 고유명사는 일본어인 '카이쥬(괴수)'에서 따왔고 대 괴수용 거대로봇의 고유명사는 독일어인 '예거(사냥꾼)'에서 따왔다. 마침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진격의 거인'에서 나오는 주인공 성이 '예거'인 것이 떠오른다.

거대 방벽을 세워 거대한 적을 막으려는 시도 역시 '진격의 거인'이 떠오른다. 최근 개봉했던 좀비영화 '월드워Z'에서도 거대방벽으로 적들의 침공을 막으려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는데 사실 이런 요소들은 '진격의 거인'만의 요소도 아니고, 오마쥬조차도 아니지만 최근 한국에서 일본 서브컬쳐를 대표하는 작품이 '진격의 거인'이다보니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진격의 거인'부터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듯 싶다. 로봇과의 정신적 싱크로 등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떠올리는 듯 싶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신혼(神魂)합체 고단나'. 지구상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괴수들의 침공과 이에 대항하여 세계 각국에서 개발한 거대로봇들과의 사투. 2인조 탑승방식(합체는 안하지만),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괴수와의 싸움 도중 죽는 소중한 파트너, 그로부터 몇년 후의 이야기...물론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 여기저기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설정인데다가 조종방식과 두사람의 정신 교감 등도 어디서 본 듯한 요소.

나라별로 각기 다른 로봇이 있고 각각의 생김새도 개성적, 기술도 개성적인 것이 마음에 든다. 스트라이커 유레카의 흉부 미사일 런쳐나 집시 데인저의 플라즈마 캐논, 체인소드, 엘보로켓...기술을 쓸 때 기술명을 말하는 것 또한 로망! 가슴에서 돌아가는 붉은색의 원자로도 멋지고, 스트라이커 유레카의 건담 같은 가슴에 불 들어오는 것도 멋지다. 트랜스포머가 그랬듯이 미국SF스러움이 가미되어 대폭 투박하면서도 리얼함이 강조된 디자인이지만 일본 수퍼로봇스러운 멋도 간직하고 있어 기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플라즈마 캐논이 적에게 작렬할 때 그 장면을 한번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연속으로 3번 보여줘 '필살기'를 강조하는 표현기법이라던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적을 체인소드로 머리부터 꼬리까지 반토막 낸 뒤의 멋지게 앉아있는 포즈(적은 저 뒤에서 반으로 갈라지고), 기지의 엘레베이터가 나오는 장면에선 기존에 썼던 영상을 다시 보여줘서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뱅크샷 오마쥬를 한다던지 못알아채도 상관없지만 알아채면 더더욱 재밌는 자잘한 재미도 가득하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카이주 매매상 배역은 론 펄먼(Ron Perlman)이 담당했는데, 알고보니 헬보이 배역. 블레이드2에서도 나온 적 있으니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작품의 감초 같은 느낌이다. 심지어는 엔딩 스탭롤 올라가다가 나오는 시크릿 영상에서조차 다시 한번 등장하여 재미를 주니 그야말로 감초. (별 것 아니지만 한국 특성상 이 영상을 보지 못하고 나간 관객이 대다수. 영화가 끝나고 스탭롤이 올라가다가 깜짝 영상이 하나 나오니 챙겨보도록 하자.)


길예르모 델 토로 하면 초창기 '미믹(1997)'을 재밌게 봤고, 블레이드2와 헬보이 시리즈 등 좀 어두운 분위기의 히어로물 감독으로 인식하다가 충격적인 다크판타지 '판의 미로(2006)'에서 꽤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죽하면 길예르모 감독이 제작에 참여한 '오퍼나지(El Orfanato, 2007)'나 '줄리아의 눈(Julia's Eyes, 2010)'까지 챙겨봤겠나. 이후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을 만든다길래 엄청 기대했는데 리들리 스콧이 만든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2012)'를 보고 '광기의 산맥' 제작을 중단한다고 하여 실망(근데 다시 만든다는 글도 어디서 본 듯 한데)...그러다가 괴수/수퍼로봇물인 '퍼시픽 림'을 길예르모가 만들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길예르모는 좋아하는 감독이지만 '퍼시픽 림'에서는 길예르모 특유의 느낌은 많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물은 마음에 든다.

유치할 수 있는 내용과 장면, 설정들을 뛰어난 영상기술과 적적한 템포의 전개로 커버하여 대중적인 헐리우드 SF영화로써 재현해냈다. 일본 서브컬쳐물의 영화화에 대한 모범적인 답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결국엔 막강한 자본력과 기술력? 덤으로 뛰어난 연출력까지)


(2013.7.21 14:25 김포 롯데시네마 관람)

덧글

  • 알트아이젠 2013/07/22 16:51 #

    단점도 있지만, 장점이 그러한 단점을 압도하더군요. 2회차가 절로 생각나는 영화인데, 다시 아이맥스 3D로 볼 수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집시 데인저나 스트라이커 유레카 피규어가 가지고 싶네요.
  • 플로렌스 2013/07/22 17:02 #

    재밌더군요. 명작입니다.
  • Vapid 2013/07/22 16:54 #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평이 극명하게 갈리길래 걱정했는데 전혀 걱정할 필요도 없었던ㅎㅎㅎ 화끈하고 시원한 영화 ^^;; 집시데인저 디자인은 다시 봐도 솔직히, 별로 안 멋있어...인데 영화에서는 왜 그리 멋지고 잘 빠졌고 간지가 철철 흐르던지 -.-;; 역시 크기가 압도적이다!를 눈으로 느끼는 영화니까 가능했던 걸까요 콩깍지...
  • 플로렌스 2013/07/22 17:03 #

    저도 사진으로 봤을 땐 별로였는데 영상으로 보니...그 거대한 로봇이 온몸 여기저기에 불 켜져서 실제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멋지던지. 필살무기들도 멋지고요.
  • 사월십일 2013/07/22 17:16 #

    사실 전 마지막 장면까지 보면서 건버스터를 떠올렸죠. 에반게리온 얘기를 많이들 하시는데 정작 에반게리온보다는 마징가나 보톰즈, 플로렌스님이 말씀하신것처럼 고단나 생각도 나고. 여튼 중요한건 이 영화는 짱짱맨이라는 겁니다(...) 이건 덕들을 위한 아트하우스 영화죠.
  • 플로렌스 2013/07/23 09:55 #

    적 기지에서 동력로 폭발...최후의 자폭공격 역시 수퍼로봇의 로망이지요. 겟타부터 시작해서...70~80년대 수퍼로봇스러움을 많이 간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무기 쓸 때마다 무기 이름 말하는 것 또한 백미.
  • 금린어 2013/07/22 18:34 #

    전 길예르모 델 토로 하면 악마의 등뼈나 판의 미로 같은 스릴러 류가 먼저 떠올랐는데 퍼시픽림 보고 완전히 이미지가 반전됐습니다 ㅎㅎ
  • 플로렌스 2013/07/23 09:56 #

    저도 판의 미로에서 확 주목했었는데 이런 SF물도 잘 만들 줄은...대단했습니다.
  • 풍신 2013/07/22 18:50 #

    일단 시작하면서 파일더(X) 헤드 온을 하는게 마징가!? 게다가 라돈이라던지 많이 떠올리게 하더군요. 파트너 죽고, 몇년 후, 역전의 파일럿이 돌아온다. 파트너는 젊은 여자 아이에 기지 사령관 딸! 게다가 가슴의 터빈은 은근히 플라즈마 드라이브를 떠올리게 하고!!! 적들은 괴수! 각 나라마다 고유의 로봇을 갖고 있다. 옙. 저도 이것저것 많이 떠올렸지만, 역시 신혼합체 고단나를 빼놓을 수 없더군요. (싱크로와 마코 디자인은 아무래도 에바?)

    마지막 스탭롤 중간의 그 장면에서..."과연 헬보이" 씹혀도 멀쩡해!!! (...라고 속으로 외쳤습니다. OTL.)
  • 플로렌스 2013/07/23 09:57 #

    가슴에서 회전하는 플라즈마 드라이브! 이것저것 많이 떠오르지만 신혼합체 고단나가 특히나 떠오르더군요. 엔딩크레딧의 그 장면, 그런 상황에서 농담 한마디 하며 튀어나오는 것 또한 헬보이스러웠습니다;;
  • FlakGear 2013/07/22 19:35 #

    미믹, 헬보이 시리즈, 블레이드2는 제 유년기와 성장기에 지대한은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친 영화였어요. 평범한 현실세계와 일반 사람들은 모르는 판타지적 세계가 존재할때, 판타지적 세계에 대한 표현을 아름답지만 치명적이게 표현하는 재능이 있으신 것 같아요.

    이번 퍼시픽림도 카이주에 대한 표현이나 카이주 오타쿠인 박사가 맨날 시체만 보고 하악대다가 직접 카이주와 대면할때 혼비백산한것은 윗 점을 묘하게 떠올리게 만들었어요. 로봇대괴수는 흥분되는 사건이겠지만 현실의 문제로 스멀스멀기어오른다면 정말 싫을(?)

    그나저나 론 펄먼 분이 나온다길래 처음 배경 설명 부분에서 폴아웃처럼 "전쟁은 변치 않는다"고 말해줄 것 같았(...)
  • 플로렌스 2013/07/23 09:59 #

    판의 미로에서 그런 면이 크게 부각되었지요. 퍼시픽림은 길예르모스럽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상당히 명작이라 생각됩니다.
  • 나이브스 2013/07/22 21:04 #

    헬 보이님이시라 괴물 뱃속 구경 해도 내일 아침 두통만 걱정하시죠.
  • 플로렌스 2013/07/23 09:59 #

    참 헬보이다웠습니다.
  • 울트라김군 2013/07/22 21:05 #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까지 5회차 감상이 목표입니다[...]
    정말 이정도로 재미있게 본 영화는 쥬라기공원 이후로 처음이에요.
  • 플로렌스 2013/07/23 09:59 #

    5회차...!!! 엄청나군요; 저도 제대로 다시 한번 보고 싶긴 합니다만...
  • 오오 2013/07/23 02:38 #

    비범한 감독이 만든 비범한 영화죠.
    감독의 인터뷰를 영화 보기전에 둘러봤는데, 진짜 솔직하게 말하더군요.

    요즘 영화에서는 잊혀진 열정을 볼 수 있을 거다...
    이 영화는 괴수와 로봇을 사랑하는 이들이 만든, 괴수와 로봇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다.

    걱정은 흥행이 기대 이하라는 점도 있으나, 그보다 첫 결과물이 이정도다보니, 혹 다른이가 비슷한 것을 시도하더라도 이걸 넘어서는 것이 굉장히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느껴지는 거죠.
  • 플로렌스 2013/07/23 10:01 #

    로봇이 나오는 작품에 이만큼의 자본금을 투자해서 이만큼의 고퀄리티 작품을 만들어내기는 앞으로도 힘들 것 같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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