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부터 이한열까지, '1987' 영화감상

1987 (장준환 감독, 2017 .12.27 개봉)

수십년을 신촌에서 살았다. 1980년대,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신촌로터리는 지하철 2호선, 다주쇼핑센터, 신촌시장, 기차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굴다리시장, 동원연탄공장 등의 풍경과 화염병, 최루탄, 데모, 전경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나면 창문을 닫고 이불 속에 숨었다. 눈과 코를 찌르는 최루탄은 신촌 인근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일상이었다. 공기를 타고 집 안에 흘러들어온 최루연기에도 얼굴이 따가웠고, 눈이라도 비비면 지옥을 맛볼 수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정권 시절 문재인과 함께 경희대에서 군사독재 타도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아버지 덕분에, 대학생들이 왜 저렇게 싸우는지 어린 나이에도 알 수는 있었다. 하지만 허구한날 터지는 최루탄 때문에 당장 내가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시위(당시에는 '데모'라 불렀다.)가 끝나면 신촌로터리, 연세대 앞에는 끔찍했던 흔적으로 가득했다. 도로를 나뒹구는 화염병, 찢어진 전단지, 벗겨진 신발, 벗겨진 옷가지, 바닥에 흐르는 피...일정 시간이 지나면 순식간에 사라졌던 순간의 흔적들은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1987년 6월. 아버지와 신촌에서 연세로를 지나다가 연세대의 시위 현장을 봤다. 비록 전경들 너머로 멀찍이서 보다가 황급히 대피했지만 그 날, 그곳에서 이한열이 쓰러졌다. 지금도 아버지는 그 당시 우리는 역사의 현장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지역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울에서는, 당시 전두환 욕을 하면 경찰에게 잡혀가서 고문당하다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간다던지, 빨갱이 누명을 씌워 죽인다던지 하던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서울 곳곳에서 펼쳐지는 살벌한 검문과 강압적인 수사는 시민들의 반감을 사기엔 충분했다. 그랬기에 대학생들처럼 직접 나서서 싸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성당에서, 절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택시와 버스들이 크랙션을 누르며 응원하고, 타고 있는 승객들이 박수를 쳐줬다. 빌딩 밖으로 직장인들이 머리를 내밀고 대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쳐주던 상황은 직접 동참 못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십년이 흘러 당시의 기억은 잊혀져 갔고,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왜곡하려는 사람 또한 많아졌다. 1987은 그 당시로 다시 되돌아가볼 수 있는 영화였다. 대한뉴스로 시작되는 영화는 의미심장하다. 당시 영화관에서는 영화 상영 전에 대한뉴스라는 것을 강제로 보여주며 국민들을 전두환식으로 교육하려고 했다. 새벽 6시와 저녁 6시에는 애국가가 울렸으며 전 국민이 길을 가다 멈춰서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박정희의 통금령을 없앤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와 80년대 후반의 노래들, 복장은 묘한 그리움과 함께 슬픔을 가져왔다. 내 기억 속의 1980년대 신촌 풍경과 연세대 앞 풍경을 비교적 비슷하게 CG로 재현해낸 것이 신기하면서도 반갑기도 했고, 이런식으로 재현됨에 착찹하기도 했다.


영화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부터 이한열까지를 놀랍게 묘사해 나아간다. 민주주의는 결코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진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맡은 일을 해냄에 따라 밝혀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참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군상극임에도 불구하고 산만하지 않게 이야기가 흘러간다.

김태리를 통해 시위에 참석하지 않는 일반인의 상황과 심정을 대변한 것 또한 좋았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에서처럼 불의에 침묵하는 자에게 언젠가 같은 상황이 찾아왔을 때, 더이상 그를 도울 사람은 없을 수 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말과 가족을 생각하라는 말은 뼈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나 혼자는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세상은 바뀌어왔다. 그런 점을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보여주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벗겨진 신발을 소재로 이한열을 묘사한 것 역시 훌륭했다. 로이터 통신의 유명한 한 장의 사진. 벗겨진 신발 한 짝을 모티브로 이렇게까지 영화적으로 잘 만들다니.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나름 반전인 부분이지만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슬픈 결말이었을 수도 있겠다. '지구를 지켜라'라는 전설의 B급 블랙코미디를 만든 장준환 감독이 언젠가는 제대로 뭔가 성공시킬 것 같더니만. 현대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서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깔끔하고 세련되게 잘 뽑아낸 최고 수준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2018.1.20 13:40, 메가박스 화곡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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